건설적? 건설적!

출근길에 라디오를 듣다가 문득 귀를 기울이고 들은 CM이 있다. 어느 건설회사의 광고였는데, 카피가 이렇다. "가장 건설적으로 생각하는 회사는 건설회사다"

모르긴 해도, 카피라이터든 클라이언트든 어느 누군가는 이 워딩을 떠올려 놓고 스스로 꽤 흡족해 했을 것 같다. 광고나 마케팅 쪽 업계 종사자들이 즐겨 쓰는 말로 '인사이트 있는' 접근이라고 생각했으리라. 재미있는 언어유희이기도 하고, 업의 본질을 잘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고, 그러면서 간결하다고.

물론, 저 카피를 쓴 사람이 특별히 정치경제적 가치를 드러내려고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러면서도 어쩔 수 없이 무심코 드러내 버린 가치관 때문에 그걸 듣는 나는 출근길이 영 편치 않았다. 감상을 요약하자면, 무섭구나, 이 나라가 걸고 있는 저 소름끼치는 드라이브는- 정도라고 할까.

'건설적' 이라는 건 뭔가? 에둘러 표현하지 않고, 또 외교적 수사를 빼고 말한다면 '일단 무언가 가시적인 것을 만들어내고 보자는, 그것이 효율적이라는' 가치다. 옳으냐 그르냐 보다, 그것이 효율적이냐 아니냐, 생산적이냐 아니냐-가 더 중요하다는 가치다. 그리고 정상적인 단계를 밟아온 사회, 정상적인 21세기적 사회 의식 수준에 도달한 사회에서라면 입밖에 내는 순간 조롱당할 수준의 가치다.

그런데, 어느새 이 사회에서는 오히려 그런 지향을 드러내는 일이 자랑스러워 할 일이라고 여겨지게 되었다. 그 반대쪽 지향은 말 그대로 태동 단계에서 멈추고, 오히려 그 수태 이전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강력한 보수반동의 기세만 등등히 올려주는 꼴이 되었다.

유엔 경제,사회, 문화적 권리 위원회는 어제 제네바에서 한국 국가인권위원회가 유명무실화되고 있는 상황에 대해 지적하고 깊은 우려를 표하였다. 이미, 지난달 아시아인권위원회(AHRC)가 국가인권기구 국제조정위(ICC)에 서한을 보내 한국의 인권등급을 A에서 B로 낮추어 줄 것을 공식 요구하였고, 그에 앞서 ICC의 제니퍼 린치 위원장은 유명한 외교통상부 장관 앞으로 서한을 보내 한국 국가인권위원회의 등급재심사를 고려하고 있다고 강력히 경고한 바 있다. 국제기자협회(IFJ)는 작년, 언론에 대한 한국정부의 정치적 압력과 간섭을 비난한다는 제목의 성명을 홈페이지에 게재하고 전세계에 타전하였다. 물론, 이런 기사들을 조중동은 보도하지 않거나, 억지논리로 외면하거나, 한줄짜리 기사로 흘려버린다.

어제부터 4대강 사업의 첫 삽질이 전국에서 시작되었다. 다양한 계층의 필사적인 반대는 차치하고서라도, 아직 국회에서 예산안 심의조차 시작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즉 사업비가 정해지지도 않았는데 사업부터 시작하고 보자-는 생각이 국가적인 레벨에서 통용되고 용인된다는 점에서 과연 현 시점의 우리 사회가 정상적인 법치국가가 맞는지, 21세기의 보편적 의식수준을 가진 나라가 맞는지 회의하지 않을 수 없다. 하기야, 법 제정 과정은 잘못됐지만 그 결과인 법률안은 유효하다-며 민주주의 사회에서의 법의 근간을 통째로 뒤흔들 말을 서슴치 않는 집단이 바로 그 법을 다루는 최고기관인 헌법재판소라는 포복절도할 아이러니가 가능한 나라, 집을 빼앗기고 울부짓는 사회최빈곤층 약자들의 시위에 경찰특공대를 출동시키는 나라, 그 무자비한 진압과정에서 사람들이 목숨을 잃어도, 저항한 사람들의 화염병엔 중형의 실형을 선고하고, 진압한 경찰의 수장은 칭찬하고 영전시키는 나라, 서민을 위한다는 사탕발림의 그림자 속에서 소득세를 낮추고 간접세 비중을 높혀 노골적으로 부익부 빈익빈을 극가속시키고, 결국 OECD 국가중에서도 부의 재분배 꼴찌라는 오명을 뒤집어쓰는, 그리고도 아무렇지 않아 하는 나라, 이런 나라에 살면서 겨우, 예산이 정해지지 않았어도 일단 삽질은 시작하고 보자-는 '건설적'인 생각을 회의하는 것은 지극히 배부른 생각일지도 모른다.

몇년 전, 개인별로 맞춤 재테크를 해주고 재산 포트폴리오를 짜준다는 컨셉을 광고하고 싶어한 어느 증권회사의 광고 시안에 내가 "나라가 잘 살아야 국민이 잘 산다는 생각, 이제 국민 하나하나가 잘 사는 나라가 잘 사는 나라-라고 바꾸어 생각하면 어떨까요. 국민에 대하여 경례-" 라는 카피를 썼더니 당장 높은 분들이 질겁했던 기억이 난다.

어느쪽이 질겁할 일이고, 어느쪽이 질겁하지 않을 일일까? 똑같은 뇌를 가졌으되 정반대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공존하는 세계에 나는 살고 있다. 내가 선택해 태어난 나라가 아니고, 내가 바꾸고 싶다고 쉽게 바꿀 수 있는 나라가 아니다. 오늘도 누군가는 싫으면 니들이 떠나라-고 손가락질 하고, 누군가는 정말로 회한으로 뒤돌아보며 이 땅을 떠나고 있다. 그리고, 떠날 수라도 있구나 하며 부러워하는 나같은 사람도 있다.

처음으로 돌아가 말하자면, 나는 '건설적'인 생각이 좋은 생각이라며 자랑스럽게 광고하는 사람이 책임지고 짓는 아파트에선 절대 살고 싶지 않다. 모름지기, 그 '건설적' 생각의 결과물이란 게 어떤 것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으니까.

by 현카피 | 2009/11/11 16:35 | 트랙백
건담 시드 /데스티니 -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는 선택지에 대하여

건담 시리즈의 애호가라고 하더라도, 아니 오랜 애호가일수록 시드/데스티니에 대해서는 험한 평이나 노골적인 조소를 서슴치 않는 경향이 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요약하자면 꽃미남 꽃미녀가 줄줄이 등장하고 울긋불긋 화려하게 치장된 기체가 한꺼번에 정신없이 등장하는 등 청소년, 특히 여자아이들에게 셀링 포인트를 맞춘, 할리퀸 로맨스의 건담版 이라는 것이다. 나 역시 일반적인 세간의 평과 크게 다르지 않은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기에 각각 50화씩, 총 100화나 되는 시리즈를 선뜻 보기 시작하기에는 이러한 선입견이 큰 장애물이었지만, 역시 지루하게 계속되는 불경기 덕(?)에 짧은 기간 동안 뭉텅뭉텅 시간을 내어 순식간에 전 편을 다 볼 수 있었다.

선라이즈社가 제작한 시드(기동전사 건담 SEED)는 2002년 10월부터 2003년 9월까지 MBS/TBS에서 방영되었고, 후속작 격인 시드 데스티니(기동전사 건담 SEED DESTINY)가 2004년부터 바로 연이어 방영되었다. 이 시리즈를 보며 가장 처음 든 생각은, 마뜩지 않던 이 신세대 건담이 의외로 오리지널 건담에 대한 경건한 오마쥬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이다.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요소가 속칭 우주세기 건담으로 불리는 오리지널 건담 시리즈의 곳곳에 등장했던 그대로 등장하거나 그 원형을 감추지 않고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형태로 등장한다. 골수 건담팬이라면 오히려 중간중간 입가에 미소를 머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보면 시드/데스티니에 대한 단도직입적인 폄하는 약간 부당하다고 해야할지도.


두 시리즈를 보는 내내 불편하고 짜증났던 등장인물이 있다. 시드의 프레이(프레이 알스터)와 데스티니의 신(신 아스카)이다. 프레이는 전쟁의 양방 중 코디네이터 측의 자프트軍에게 아버지를 잃고, 자프트와 코디네이터에 대한 증오에 사로잡힌다. 주인공인 키라를 이용해 조금이라도 더 많은 적을 죽이기 위해 광분하고, 원래의 연인마저 힘이 없다는 이유로 버린다. 그녀에게 코디네이터가 적인 이유는 두가지다. 코디네이터가 자신이 속한 원래의 인간(내츄럴)과 '다르기' 때문이고, 그들의 군대가 자기 아버지를 죽였기 때문이다. 내 가족, 내 집단에게 해를 입혔기 때문에 적이라는 단순명료(?)한 사고는 데스티니의 주인공 신 아스카의 그것과 같다. 신은 피난 중 군대간의 교전에 휩싸여 부모와 여동생을 잃는다. 힘이 없어 소중한 가족을 잃었다고 분노하고 자책하는 신은 자프트군에 입대해 최신예 모빌수트의 파일럿이 된다.


보는 내내 짜증나고 불쾌했던 이유는, 만화 주인공일 뿐인 이들의 소아적인 가치관을 그저 만화 속의 것으로만 편히 지켜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프레이의 아버지는 지구연방의 요인이었고, 주요 전투함을 타고 전장 한복판에 있었다. 프레이의 아버지가 죽은 것은 프레이에게 큰 슬픔이겠지만 상대방의 수많은 군인들도 죽었을 것이고, 그들 대부분은 누군가의 아버지이고 남편이었을 것이다. 자신이 내츄럴(유전자 기술의 혜택을 입지 않은 지구의 인간)이기 때문에 코디네이터(유전자 기술로 육체적/정신적 능력을 향상시켜 우주에서의 생존력을 높인 인간)를 적대하는 게 당연하다면, 그 반대의 경우- 내가 코디네이터이기 때문에 내츄럴을 적대하고 죽인다는 입장을 가진 자에게도 할 말이 없다. 신 아스카의 경우는 더 심하다. 신의 모국인 오브수장국은 내츄럴과 코디네이터간의 비이성적인 전쟁에 반대하여 중립을 선언한 국가다. 오브의 지도부는 중립을 유지하기 위한 힘을 가지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만 결국 야욕에 휩싸인 지구연방군의 공격을 받는다. 지도부는 국민들을 피난시키고, 국가의 주요 군사시설을 스스로 파괴시키고, 정치적으로 이용당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 죽음을 택한다. 그 직전, 이들은 우주로 피난하는 자신의 아이들에게 어리석은 전쟁을 이어나가지 않겠다는 오브의 이념을 이어달라는 유지를 남긴다. 신의 가족은 피난선을 타기 위해 이동하던 중 우연히 전화에 휘말린 것인데, 역시 참으로 단순무식하게도 신은 힘이 없어 가족을 잃었다고 생각하고, 모국의 이념을 자기 가족을 죽인 쓸모없는 이상론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이 힘을 얻어 더 많은 적을 죽이는 것을 당연한 정의라고 생각한다.


2009년의 우리는 멀지 않은 곳에서 수많은 프레이와 신을 본다. 아니, 수많은 그들에 완벽하게 포위되어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적은 적이기 때문에 무조건 나쁘고, 나와 내 가족이 피해를 입으면 무조건 피해를 입힌 상대가 나쁘고, 내가 나와 내 가족의 이익을 위해 하는 행동은 선이고, 나와 내 가족이 아닌 이들이 입는 부당한 피해나 상처는 나와 상관 없는 일, 내가 몰라도 되는 일이다- 라고 아무 의심 없이 생각하는 우리 사회의 절대다수들. 대중들. 선량(?)한 시민들... 이들에게는 진실이 어디에 있는지 고뇌하고, 몸으로 아군의 총구 앞을 가로막고, 서로의 소중한 사람을 죽인 상대를 이해하려고 힘겹게 노력하는 주인공 키라와 아스란, 발드펠트, 라크스, 카가리 등이 이해할 수 없는 싸이코들이거나 속으론 절대 그럴 리 없는데 성인군자연하는 하는 위선자들로 비칠 것이다. 자신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기에 위선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겨우 만화의 주인공들에게도 투사할 수 있는 쉬운 논리와 이성을 현실 속에서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들이 절대다수인 사회를 과연 정상적인 21세기적 수준의 사회라고 할 수 있을까?


너와 네 가족을 위해 최선을 다해라, 경쟁해라, 승자가 아름답다-고 이 사회는 끝없이 주입한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이제 나는 시스템이 그 속의 사람들을 세뇌시키는 건지, 이기적 본성에 사로잡힌 인간들이 그러한 시스템을 강화시켜 나가는 건지 잘 모르겠다. 전자라고 믿는다면 그나마 희망이 있겠지만, 나는 자꾸 후자의 답을 의식하게 된다. 그렇다고 한다면,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건담 시드의 주인공 키라 야마토는 그 자신이 코디네이터이지만 코디네이터와 지구군 양방의 집단 이기심에 맞써 싸울 기체- 프리덤 건담을 탈 수 있었다. 아스란 자라에겐 지구를 말살하려는 이기심에 휩싸인 아버지와 동료들 앞을 가로막을 저스티스 건담과 세이버 건담이 주어졌다. 지구군이면서 지구군의 광기를 용인할 수 없었던 라미아스 함장은 아크엔젤이라는 신예함을 몰고 지구군과 자프트군 사이를 가로막을 수 있었다. 현실의 내게는 최신예 모빌수트도, 양전자포로 전장을 가르고 멈출 함정도 없다. 이 세상에 보편타당한 정의가 어딨어, 자신의 이해관계를 넘어서는 도덕률이라는 게 어딨어, 내가 왜 다른 사람 이익까지 생각해야 돼, 너는 설마 그렇다는 거야? 에이 위선이겠지- 하고 대들고 조롱하는 사람들만 있을 뿐이다. 심지어 그들은 나의 가족이고 친구이고 선후배들이다...


키라와 아스란, 라크스, 발드펠트는 야킨드웨 공방전을 끝으로 전쟁이 마무리되자 오브의 외진 해변에 모여 살았다. 전화(戰火)가 다시 번졌을 때 그들은 원래 자신들이 각각 속했던 진영으로 돌아가 그전까지 집요하게 그들을 괴롬혔던 인간의 이기심과 욕망, 편을 가르는 소아병적 집단 광기에 또 한 번 휩싸이게 된다. 역으로 말하자면, 동물적 본성으로서의 이기심을 극복하려는 자는 그 이상을 공유하는 소수와의 피난처 속에서만 평화로울 수 있다는 것일까? 아마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 세상 누가 그런 소수의 외진 삶을 꿈꿀까만은, 두렵다, 주어진 선택지가 그것밖에 없을지도 모른다는 피할래야 피할 수 없는 예감이.

by 현카피 | 2009/08/13 13:38 | 글목록 | 트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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